Rene Magritte, Meditation, 1936. © Rene Magritte

존 해밀턴의 책, 『Security』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리스 로마 문화 전반에 걸쳐, 바다는 지속적인 불안의 원천이 되었다.” “자연이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 곳인, 땅의 견고함으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어떤 욕망도 예외 없이 어떤 위반의 종류로 간주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일곱 현자 중 한 명은, “믿을 수 있는(the trustworthy)” 것에 이름 붙이기를 요청받았다. 그는 즉시 “육지”를 선포하고 결과적으로 “바다”를 ‘믿을 수 없는 것(the untrustworthy)’으로 규정하는데 이른다. 바다와의 협상은 사기나 파괴를 꾀하는 부도덕하고도 기만적인 파트너와의 거래로 비유될 수 있다.”

“인간이 거주할 수 있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저 너머에 있는 것”은 육체적으로 획득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상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통로(passage)를 위협하는 한, 그것은 신화적인 치유나 이론적인 추측의 주제가 될 수 있는 영역인, ‘밟히지 말아야 할’(아바톤(abaton)) 영역인 신성한 공간과 유사하다. 거대한 “강”으로 여겨졌지만, 바다는 멀리까지 뻗어 나가, 어쩌면 천상의 돔에 닿을지도 모를, 끝없는 것으로 믿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바다는 무수한 우주론적 계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일리아드의 한 대목에서는, 바다는 ‘신의 기원’(14.201)으로 여겨지고, 네오플라토니스트 다마스키우스(Neoplatonist Damascius)에 따르면, 고대 오프리스의 글들은 바다의 물을 원시적 물질로 간주하였고, 그 속에서 우주론적 응집과 퇴적 과정을 통해 서식가능한 지구가 출현했다고 한다. (…) 무시무시한 용, 악마 같은 짐승, 실라와 차리브디스(Scylla and Charybdis), 아스피도켈론(Aspidochelone), 그리고 심지어 리바이어던까지도 득실거리는, 탁 트인 바다에 대한 공포에는, 이 혐오스러운 혼란의 소용돌이에 삼켜질 것 같은 두려움이 적잖이 있었다.”

허먼 멜빌 또한 이렇게 썼다. “굳세고 건강한 정신에 굳세고 건강한 신체를 가진 젊은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바다에 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대가 난생처음 배를 타고 여행할 때, 당신이 탄 배가 이제 뭍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로 나왔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신비로운 전율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이 바다를 신성하게 여긴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리스 사람들이 바다의 신을 따로 두고, 그 신을 최고신 제우스의 형제 자리에 앉힌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들은 하나도 무의미하지 않다. 샘물에 비친 아름다운 영상을 잡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물에 뛰어들어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이야기에는 훨씬 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영상을 우리는 모든 강과 모든 바다 속에서 본다. 그 영상은 결코 잡을 수 없는 삶의 환영이고, 이것이야말로 그 모든 것의 열쇠인 것이다.”

바다는 왜 항상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가?


허먼 멜빌, 제 1장.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 모비딕, 김석희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