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는 기원전 8세기경에 활동한 이스라엘 예언자이다. ‘요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비둘기라는 뜻으로, 하느님은 요나에게 아시리아 수도 니네베로 가서 이교도를 개종시키라는 명을 내리지만, 요나는 겁이 나서 도망치기로 작정하고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한다. 요나는 마침 야포에서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랐다. 하느님은 바다에 큰 폭풍을 일으켰고, 뱃사공들은 원인을 밝히고자 제비뽑기를 하였다. 제비뽑기에 뽑힌 요나는 자신이 하느님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자신을 바다에 내던질 것을 권한다. 뱃사공들은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 (…) 저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요나 1, 14)라고 부르짖은 후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졌다. 성난 바다는 잔잔해졌고, 하느님은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했다.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그가 물고기 배 속에서 감사 기도와 함께 “구원은 주님의 것”(요나 2, 10)이라고 기도하자, 하느님께서는 물고기에게 요나를 육지에 도로 뱉어 내게 한다. 하느님은 다시 요나에게 니네베로 갈 것을 명하고, 요나는 도시의 파멸이 다가왔다고 외친다.
요나와 고래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는 3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구성이지만, 극적이고 교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부터 인기있는 주제였다(큰 물고기로 묘사되는 요나서의 해양생물은, 고래 또는 바다 괴물로 해석되어오곤 했다). 큰 물고기 배 속에서 3일 만에 살아나온 요나의 일화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예형으로 여겨진다. 물고기를 묘사하는 방식은 시대별로 차이를 보이는데, 가령 바티칸에 있는 3세기 석관 부조에는 ‘요나와 물고기’ 그리고 ‘아주까리 덩굴 아래서의 휴식’이라는 두 에피소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 부조에는 요나의 일화 이외에 원죄, 노아의 홍수, 모세, 그리고 착한 목자 등 여러 일화가 산만하게 등장하지만, 요나의 일화는 물고기와 아주까리 잎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분명히 그 의미를 전달한다. 한편 12세기 독일 보름스 대성당의 남측 출입구의 아키볼트에는 요나가 물고기에 잡아먹히고 있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제 요나의 이야기는 내러티브 전개에서 벗어나 물고기 입으로 들어가는 예언자의 모습으로 묘사된 것이다. 1304년 조토가 스크로베니 예배당 프레스코화의 장식띠 부분에 그린, 요나는 매우 단순한데 그는 요나임을 상징하는 물고기만을 부각하여 작은 프레임에 압축적으로 표현하였다. 보름스 대성당의 부조가 물고기의 입으로 들어가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예언자적 모습이라면, 조토가 그린 두 발을 허우적거리는 요나의 모습은 매우 인간적이며 다가올 르네상스를 예견한다. (…)
17세기에 접어들면, 물고기 배에서 살아난 요나는 회개와 구원, 그리고 부활이라는 교훈적인 의미를 지닌 주제뿐 아니라 바다 풍경을 그릴 수 있는 좋은 소재로 변화한다. 1603년 앤트워프에서 활동했던 안드리스 반 에르트벨트는 ‘바다의 아들’이라는 애칭이 붙을 만큼 바다 풍경을 즐겨 다루었다. 그는 특히 폭풍우 치는 바다 풍경을 선호하였는데 <요나와 고래>는 제목을 보고 화면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가 그린 다른 바다 풍경과 구별하기 어렵다. 이 장면은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처럼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장면을 그리고 있지만, 멀리 원경에 떠 있는 배들과 비바람치고 일렁이는 바다와 검은 구름 때문에 요나의 내러티브보다 풍경이 강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