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cription in the Print, made by anonymous, Jacob Matham, After: Hendrik Goltzius, Gestrande Walvis bij Berckhey(The beached sperm whale near Berkhey), 1598. ©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1598년 네덜란드의 화가 헨드리크 골지우스(Hendrick Goltzius)가 그린 그림에는 해안가에 떠밀려 온 고래가 어딘가 기이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기이함은 고래의 골격과 생김새가 해부학적으로 정확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골지우스의 그림은 고래 지느러미를 귀로 착각하는 등 해부학적으로 부정확한데, 이는 그가 해변에서 스케치를 한 다음에 작업실에서 그림을 완성했음을 암시한다. 골지우스의 의붓아들 제이콥 마담(Jacob Matham)은 그의 그림을 인쇄물의 형태로 재생산했고, 1601년 이탈리아의 해안, 안토나 근처의 향유고래의 표류를 묘사하는 것으로 알려진 카피본이 로마에서 출판되었다. 골지우스의 그림은 네덜란드와 그 너머에서 매우 유명해졌고 현대 네덜란드 역사의 빠질 수 없는 특징이 되었다.

1617년 빌렘 부테베흐(Willem Buytewech)는 표류된 고래의 판화를 제작했다. 좌초된 고래들의 몇몇 이미지들은 알레고리적이거나 은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부테베흐의 판화는 좀 더 보도적(reportorial)이고 즉각적이며 관객에게 예술가 스스로가 사건을 목격했었다는 사실을 제안했다. 표류된 고래에 대한 네덜란드의 수많은 판화들 중 가장 야심 차고 정교한 것은 1602년 베베위크(Beverwyck) 근처의 얀 세레담(Jan Saenredam)의 좌초된 고래이다.

Jan Saenredam, A beached whale near Beverwijk witnessed by Count Ernst Casimir of Nassau-Dietz, Dutch, 1602. ©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이 판화는 호기심 많은 구경꾼들, 높은 파노라마 시점, 그리고 극적인 하늘을 담고 있는 거대한 행군 중인 관중들과 함께, 스펙터클의 감각 속에 그 주제에 관한 다른 모든 판화를 능가한다. 세레담은 관객에게 그의 보고의 정확성을 보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상단의 라틴어로 된 서술은 사건의 지역과 날짜를 제공하며, 고래들의 치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화가가 고래들의 비율과 부분들을 기하학적인 정확도로 제공하였다고 진술한다.

관찰자들(observers)이 무력한 생물들을 측정하고 탐색, 탐사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표류는 단지 동물학적이고 산술적인 경험이 아니었다 : 이 생물들은 (…) 역사적인 사건의 상징으로 보였다 ; 많은 이들은 고래를 “국유적인oracualr 표지판(들)(signpost[s])” 또는 지독한 재앙의 징조로 바라보며, 깊은 의미를 찾아내고자 했다.

17세기에 표류된 고래들은 신의 기적적인 힘의 신호이자 곧 닥칠 파멸의 징조로 보였다. 예를 들어, 1599년에 출판된 팜플렛은 1598년 버크헤이 해변 그림을 그해 8월에 있었던 스페인의 클레브스 주변 지역 침공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판화에 함께 존재하는 라틴어 문구들은 종종 좌초된 고래라는 주제를 과거의 군사적 전투들과 자연재해를 암시하는, 재난의 징조로 명시한다.

세레담의 판화에 실린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1601년의 끝과 1602년 여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재난과 연결시킨다 : 오스텐드 항은 알버트 대공의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스페인으로부터의 보고에 따르면 거대한 무적함대가 네덜란드로 출항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냈으며, 일식과 월식, 지진, 페스트의 창궐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여러 다른 “재앙” 인쇄물처럼, 세레담의 판화 또한 신탁 문서와 기록 문서로 기능한다.

좌초된 고래들이 판화, 시구, 도덕-논쟁적 광폭으로 명성을 떨친 것은 1570년에서 1650년 사이였다. 이 시기는 정확히 네덜란드 문화가 종교적 갈등과 전쟁의 두려움과 불확실성에 의해 형성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표류된 고래가 국운에 대한 논평이나 임박한 위기의 징조로 거듭 해석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616년 1월 헤이그 주재 영국대사의 보고서는 적대행위의 시작과 중단에 관한 동시대인들의 불안감 속에서 일종의 “도덕적 구두점”으로 작용했던 방식을 시사하고 있다. “이 격동의 바로 그 장소와 시간 속에서 고래들은 가장 큰 놀라움을 유발한다. (…) 왜냐하면 이 백년 전쟁이 처음 발발했을 때, 안트워프 아래의 셸데 강에서 해안으로 몰려왔던 두 마리의 괴물이 네덜란드(홀란드)에 있었다는 하나의 사실이 기억되기 때문이다.”

또한, 물에 잠긴 고래들은 신학적으로 중요성을 띠었다. 칼뱅주의 무장가들과 그들의 적대자들(Remonstrant) 사이의 투쟁의 절정기였던 1617년에 완성된, 부테베흐가 그린 판화는 “무책임한 휴전과 반기독주의자 세력의 죄스러운 타혐에 반대하는 신이 발송한 경고”가 되었다. 고래들은 “사람들의 불안 속 격언, 예언 그리고 비유에 포함되었고” 신성한 법에 불복하는 결과를 강력하게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착취되었다.

놀랄 것도 없이, 일단 유럽 내에서 네덜란드 공화국의 위치가 좀 더 안전해보이자, 구문 주석이 포함된 좌초된 고래 판화들이 낮은 빈도로 나타났다. 실제로, 그러한 판화들은 공화국 역사의 불안정한 상태들과 일치했다. 게다가, 포경 산업의 규모는 고래잡이 이미지들에 자연주의적 요소가 더욱 더 지배적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고래는 점차적으로 상품으로서 보였고, 고래의 능력은 쇠약한 상징으로 보였다. 이 말인즉슨, “공고한 요소인 영적 징후(portent) 속 격언의 구전과 신화의 영역 바깥으로 고래는 헤엄쳤다는 문화적 연대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매우 상징적이게 되었으며 고래는 결국 “산업적 공정의 원재료”가 되는데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의 해변으로 밀려온 좌초된 고래들로 구경꾼(spectators)과 예술가 모두를 끌어모은 것은 현실과 신화, 역사적 에피소드 그리고 숨겨진(oracular) 상징 사이의 이러한 진동이었다.”

고래가 해안가로 떠밀려오는 현상은 시대를 불문하고 매우 독특한 사건으로 기억되곤 한다. 『모비딕』의 「제 2장. 여행가방」에서 이슈메일은 그가 고래잡이를 갈망하며 낸터컷에서 출발하는 배를 고집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는 낸터컷에서 떠나는 배가 아니면 타지 않기로 결심한 터였다. 그 유서 깊고 이름 높은 낸터컷 섬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 다 거칠고 사나운 느낌을 주었는데, 놀랍게도 그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뉴베드퍼드가 서서히 포경업을 독점하기 시작했고, 이 점에서 낸터컷은 가엾게도 뉴베드퍼드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낸터컷은 포경업의 발상지이고, 미국에서 최초로 고래의 시체가 해안에 떠밀려 온 곳이다.”

한편, 오늘날 과학에는 고래들이 해변으로 밀려와 죽는 현상은 자기장 간섭으로 인한 것이라는 한 가지 설명이 있다. 바다 속을 유영하는 고래가 육지로 올라와 자살에 이르는 현상을 스트랜딩(strandig)이라고 하는데, 어느 과학자에 따르면 미세하게 변하고 있는 지구 자기장 속에서 고래가 방향을 착각해 육지로 올라와 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떤 과학자들에 따르면 고래의 뇌에는 자철석이 풍부한 세포가 있어 고래가 지구 자기장을 이용해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최근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래가 길을 잃고 해변에 밀려오는 것은 태양 폭풍이 고래의 자기장 감지 능력을 무력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양 흑점의 증가와 함께 발생하는 태양 폭풍은 많은 양의 무선주파수(RF) 잡음을 일으키고 이는 자기 방향을 교란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고래가 육지로 헤엄쳐 올라오는 현상은 아직 여러 설명과 함께 연구 중이다.


Omen and oracle: Dutch images of beached whales, Victoria Sears Goldman. Avaliable at: http://www.victoriasearsgoldman.com/16th-17th-century-dutch-images-beached-whales/